yes조선일보2026. 5. 1. PM 2:38

[에스프레소] 그 이름은 배려가 아니다

정확성 아닌 감성 앞세워본질 흐려놓는 명칭 개정正名 안되면 나랏일 망쳐언어, 현실 또렷이 비춰야'2022 부산여성 취·창업 박람회'를 찾은 여성구직자들이 구직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다. /김동환 기자출산·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을 ‘경력 단절 여성’이라 칭한다. 이제는 사용이 제한된다. 어감이 안 좋고 부정적 인식을 유발한다는이유다. 그 대신 이들의 역량을 강조해 ‘경력 보유 여성’으로 바꿔 부르는 내용의 법안이 얼마 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자체마다 조례개정도 잇따르고 있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정확한 말은 아니다. 중단과 이탈의 맥락이 휘발되면서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돼버렸기때문이다. 업무 현장에서는 “그럼 현직 워킹맘은 ‘더 경력 보유 여성’이냐”며 황당해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쉬었음 청년’은 통계상 구직 없이 그냥 쉬고 있는 30세 미만의 비경제활동 인구를 뜻한다. 직관적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게으름과 무기력함을연상시킨다며 ‘준비 중 청년’ 등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고용노동부 일각에서 일고 있다. 취업 공백기를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바라보는 응원의 취지라지만, 이건 방탄소년단이 촌스러우니 BTS로 바꾸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청년들은 조소하고 있다. 문제는그대로인데 언어만 자꾸 현실을 완화하는 방식으로 꾸며내고 있다는 문제 제기다. “대단한 발상입니다. 백수를 이렇게 바꿔 부르면 일자리가 생기는건가요?”나랏일의 기본은 이름을 올바르게 짓는 것이다. 정명(正名)이라 한다. ‘논어’에서 공자가 국정의 1순위로 꼽은 일이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주장이 정연하지 않고, 주장이 정연하지 않으면 정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정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예악이 베풀어지지 않고, 예악이베풀어지지 않으면 형벌이 바르게 적용되지 않고, 형벌이 바르게 적용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게 된다.” 이름이 그에걸맞은 실(實)을 드러내지 않으면 스텝이 계속 꼬인다는 것이다. 다르게 쓰여도 똑같이 읽힌다면, 여전히 여성의 경력은 단절되고 수많은 청년이집에서 숨만 고르고 있다면, 새 이름은 배려가 아니라 기만일 따름이다.정책의 언어는 정감이 아니라 정확성을 향해야 한다. 삶의 개선은 따뜻한 착시가 아니라 차가운 직시에서 비롯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꾸엉뚱한 데를 본다. 이를테면 국내 육아 휴직 사용 비율이 낮은 건 ‘육아 휴직’이라는 명칭이 지닌 휴직의 강조 용법 때문이며, 고로 ‘아이 돌봄기간’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 인구비상대책회의 등에서 거론되는 식이다. 세상 물정 어두운 순진한 친절은 반감을 낳을 수 밖에 없다.‘혼외자(婚外子)’의 부정적 느낌을 없애겠다며 ‘출생 자녀’ 혹은 그냥 ‘자녀’로 바꿔 놓으면, 혼외자 갈등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까?누군가를 감싸면 누군가는 떨어야 한다.급기야 ‘북한’도 다르게 부르겠다고 한다. “상대의 실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언어”로써 그들 방식대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 ‘조선’으로공식 명칭 변경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탈북민’은 ‘북향민(北鄕民)’으로 부르겠다고 한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탈북, 어감도 안 좋다”고말했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이곳이 대한민국인 이상, 대한민국 헌법이 한반도를 우리 영토로 규정하는 이상 그곳은 북한일수밖에 없다. 목숨을 건 탈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과거 궁중에서 똥을 매화로 높여 불렀다 해서 똥이 매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흐리는 언어의 혼란, 이를 지적하면 되레 감수성 부족을 힐난한다. “똥 싼 주제에 매화 타령한다”는 속담이 이제는 무서워지려고 한다.